1990년 8월 15일, 소련의 락밴드 키노의 리더 빅토르 초이가 사망했다. 일단 공식적인 사인은 졸음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지만 수사 과정에서의 의문점과 경찰 측의 발표와 목격자의 주장이 어긋난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의문점 때문에 KGB가 빅토르 초이를 살해하고 사건을 은폐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사건은 1990년 8월 15일에 일어났다. 당시 빅토르 초이의 그룹 키노는 얼마 전에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어 무려 6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았을 정도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8월 14일에 빅토르 초이는 당시 소련 내 공화국이었던 라트비아의 리가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다음 앨범 녹음을 마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다음 날인 8월 15일에 빅토르 초이는 취미였던 낚시를 즐기러 Aleko Moskvitch-2141 승용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날 라트비아의 투쿰스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맞은 편에서 오던 이카루스 250 버스와 정면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차가 버스 밑에 깔려 버렸기에 빅토르의 승용차는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져 고철 덩어리가 되어버렸고 빅토르 역시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 때 빅토르의 나이는 고작 만 28세.
빅토르 초이가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소련 전역이 비통함에 빠졌고 계속되는 추모 열기 때문에 장례식이 수차례 연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빅토르를 따라가겠다고 5명의 팬들이 투신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빅토르의 팬 30여 명이 무려 4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수사를 맡은 소련 당국에서는 사고 원인을 버스 기사의 증언에 따라 빅토르 초이가 당시 130 km/h로 과속을 하며 졸음운전을 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라 하여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소련 경찰의 이 같은 발표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왜 그들은 빅토르 초이가 졸음운전으로 과속을 하는 바람에 교통사고가 났다고 한 경찰 측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것일까?
많은 소련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유명 가수의 죽음이었기에 세간의 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소련의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직접 "아무도 그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고 애도 성명까지 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빅토르 초이의 명성과는 달리 당시 수사 상황은 매우 부실했다. 그 때문에 당시 소련 사람들은 빅토르 초이의 죽음에 대한 경찰 측 수사 발표 내용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에 얽힌 의문점은 다음과 같다.
빅토르 초이가 사망할 당시 버스 기사는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증인이었다. 빅토르의 사인이 졸음운전 때문이라는 것도 이 버스 기사의 증언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찰은 사고 현장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즉, 정말로 빅토르가 당시 졸음운전으로 인해 과속을 한 것이었다면 어떤 흔적이라도 현장에 남을 것인데 경찰은 그 현장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오직 버스 기사의 증언만 듣고 사건을 졸음운전에 의한 사고사로 결론을 내려버렸다는 것이다. 버스 기사가 본인의 과실을 면피하고자 거짓말을 한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배제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에 당연히 소련 내에서는 버스 기사에게 자세한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버스 기사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종적을 감추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건 이후 러시아 방송에서 몇 번 등장한 전력이 있으며, 이름도 공개되어 있다(위 영상 참조). 왜 경찰은 왜 버스 기사의 일방적인 진술만 듣고 빅토르 초이의 사인이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사라고 결론을 내린 것인가? 1995년 KBS 일요스페셜 취재팀이 수소문 끝에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해당 버스 기사를 만나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인터뷰 말미에 그 버스 기사는 "사례는 필요 없으니 내 신원과 주소를 절대 밝히지 말아 달라"는 말을 남겼다.
버스 기사의 증언과 경찰 측 발표 내용과 달리 사고를 직접 목격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이와 전혀 달랐다. 빅토르 초이가 졸음운전을 하고 있었다는 버스 기사와 경찰의 말과 달리 사고를 목격한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빅토르 초이는 신호를 준수하고 차선을 잘 지키며 가고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버스가 반대 차선에서 갑자기 빅토르의 자동차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고 빅토르가 여러 번 경적을 울리며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가 그대로 빅토르의 차에다 들이받아버렸다는 것이다.
목격자들의 증언대로라면 사고의 과실은 전적으로 버스 기사에게 있으며 버스 기사 본인이 책임을 면피할 목적으로 사고의 책임을 빅토르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목격자들의 증언이 진실이라면 도대체 버스 기사는 무슨 이유로 빅토르의 차에다 그대로 자기 버스를 갖다 박은 것인가? 이는 어떤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목격자들의 이같은 증언은 빅토르 초이의 죽음이 단순한 교통사고로 인한 사고사가 아닐 가능성을 말해주지만 당시 수사에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대체 경찰은 왜 버스 기사의 증언만 받아들이고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은 기각한 것일까?
또, 한편으로 음주운전 사고로 사망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의문점은 이 뿐만이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시 경찰은 빅토르 초이의 시신을 부인인 마리안나 초이에게조차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마리안나에게 여권과 반지 등의 유품만 건네줬을 뿐 끝내 시신 공개는 거부했다. 도대체 유족들이 알면 안 되는 사항이 뭐가 있기에 유족들에게마저 시신 공개를 거부한단 말인가? 이러한 경찰 측의 태도 역시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고 당시 빅토르의 시신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었다고 한다. 혹시 부인이 보면 쇼크를 받을까봐 소련 경찰 측에서 심하게 배려한 것인가?
하지만 아무리 시신이 참혹하게 훼손되었다고 해도 부인에게는 자기 남편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정도는 알 권리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기본권이란 개념이 미흡한 소련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경찰 측은 빅토르 초이가 졸음운전을 해서 사고가 났다는 사고 경위만 발표했을 뿐 시신 공개만큼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 부인인 마리안나가 계속해서 시신 공개를 요구해도 경찰 측은 끝끝내 시신 공개를 거부하였다. 이 같은 경찰 측의 태도는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는 의심을 더욱 굳어지게 한다.
경찰 측의 이같은 석연찮은 태도 때문에 소련 내에서는 빅토르 초이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는 풍문이 돌았다. 이 풍문의 내용은 사실 빅토르 초이가 소련 정보국인 KGB에 의해 교통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당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빅토르가 활동할 당시 소련은 경직된 체제를 개혁하자는 개혁파와 현상 유지를 고집하는 보수파의 대립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또한 소련의 위성국가로 불린 동유럽에서는 계속해서 자유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해 사회주의 종주국이라는 지위마저도 흔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때 빅토르 초이는 자유와 저항 그리고 반전(反戰)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해 소련 사람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 같은 모습은 소련 내 보수파 입장에서는 그저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들의 입장에서 빅토르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때문에 소련 내 보수파들이 KGB를 사주해 빅토르 초이를 암살한 것이라는 게 이 풍문의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빅토르 초이가 죽은 시점도 뭔가 좀 묘했다. 빅토르가 죽은 그 날은 다음 앨범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또 아시아 공연(일본 및 대한민국)을 한 달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빅토르 초이가 여태껏 발표한 노래들을 볼 때 다음 앨범 역시 저항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일 터. 그럴 바에는 아예 앨범이 나오기 전에 먼저 손을 써서 빅토르를 죽여버리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빅토르를 저세상으로 보내버림으로서 아예 그의 앨범까지도 저세상으로 보내버려 자유의 바람을 막아버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빅토르 초이가 사망하고 1년이 지난 뒤, 소련은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걸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실제 빅토르 초이가 죽은 지 17년이 지난 2007년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빅토르 초이를 협박했다는 한 남자의 제보가 언론사를 통해 공개되면서 빅토르 초이가 사실 타살당한 것이란 의혹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경찰은 제보자의 말은 신빙성이 결여됐고 현재 빅토르 초이의 수사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재수사가 불가하다며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암살설 의혹은 현지에서도 상당히 말이 많이 오가는 주제이다. 의외로 팬들 중에서도 암살설을 반대하는 이들이 많은데, 브레즈네프 시절도 아니고 "개혁개방"을 외치던 고르바초프가 애써 슈퍼스타를 암살할 필요도 없으며, 초이는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정치적, 사회적 발언을 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나는 변화를 원한다!"의 경우, 초이 본인이 이는 개인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며 선을 그은 바 있다.
빅토르 초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녹음했던 그 앨범이 곧 키노의 마지막 앨범이 되고 말았다. 기타리스트였던 유리 카스파랸의 차에 보관되어 화를 면했던 보컬 트랙의 마스터 테이프가 레닌그라드로 보내졌고, 여기서 남은 멤버들이 연주 트랙을 녹음한 뒤 합쳐 밴드의 마지막 공식 앨범인 '초르니 알봄'을 발매했다. 발매 직후 키노는 해체했고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수만 명에 달하는 팬들이 운집해 사실상 시민장 형태로 진행되었다.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보고슬롭스코예 묘지에 안장되었고, 지금도 빅토르 초이와 키노의 팬들에게는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러시아 웹을 중심으로 해당 사건이 암살이 아닌 단순한 사고라는 설도 돌고 있다. 의외로 암살설 또한 인지도가 높은 편. 정말로 졸면서 운전했다는 설도 있고, 위 트레일러에 나왔듯 카세트를 교체하는 등 한 눈을 팔다가 앞을 못 보고, 사고를 당했다는 설도 있다. 덤으로 초이는 과속을 즐기는 위험천만한 운전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속 하던 중 사고를 당하지 않았냐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
더 마이너하긴 하지만 해당 사건이 초이의 자살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다만 자살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던지라 해당 설은 잘 지지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