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8.
1988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외국인의 피살사건으로 용의자는 특정되었지만 범죄자 인도조약이 맺어지지 않던시절이라 법의 심판을 받지않아 미제사건이 되어버린 씁쓸한 사건이었다.
1988년은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인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해였다. 올림픽을 계기로 외국인들이 들어왔고 한편으로 한국에서는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어학습붐이 일었다. 이런 이유들로 외국인 영어강사들을 채용하는 영어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고 많은 외국인들이 원어민으로 영어학원에 채용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캐롤린 조이스 아벨 또한 한국으로 들어온 영어 강사 중 한명이었다. 당시 26살이던 그녀는 해외를 다니는 것을 즐겨 하는 모험심이 많은 여성이었고, 대학 졸업 후 여러 국가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여행을 했으며 네팔에서 처음 영어강사로 일한 뒤 1987년에는 일본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때 남자친구인 일본인 남자친구 토모유키를 만났다. 그녀는 일본의 옆나라인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한국에서 유명한 S모 영어학원이 외국어 강사를 모집하자 일본에서의 경력을 기반으로 모집에 응시해 채용이 확정되어 1988년 10월에 입국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나름 한국에서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지내던중...
1988년 12월 20일, 수업이 있었던 캐롤린은 학원에 출근하지 않았고 캐롤린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된 동료 외국인 강사들과 한국인 학생 몇이 송파구에 있던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가게 되었다. 이상하게 문이 잠겨져 있지 않았고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한국 학생들이 거실을 살피고 동료 외국인 강사중 한명인 캐시 패트릭이 방에 들어가 그녀를 찾았는데 방안에서 그녀가 살해된 채로 있는 것을 발견한 캐시는 한국 학생에게 신고를 부탁해 학생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게 되었다.
경찰이 확인한 캐롤린의 시신 상태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서 공격을 받은걸 필사적으로 막으려했는지 그녀의 시신에선 다수의 방어흔이 발견되었으며 온몸 30여 군데가 칼로 난자당해 있었다. 결정적인 사인은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이어지는 목을 그은 상처였다.
경찰의 조사로 그녀가 전날인 12월 19일 평소대로 출근해 밤 10시 30분경에 퇴근해 지하철을 타고 자신의 집인 송파구 아파트로 들어간것이 확인 되었다. 이후 그녀는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지 않았고 동료 외국인 강사들과 한국 학생들이 찾아간 때는 12월 20일 낮 12시 30분쯤이었다. 즉 학원에서 퇴근해 집에 찾아간 이들이 발견해서 신고한 14시간 사이에 그녀가 살해된 걸로 보였다.
캐롤린의 동료 외국인 강사들은 그녀가 살해된것이 혹 외국인을 노린 범죄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한국 경찰은 외국인을 노린 범죄가 아니라 캐롤린의 주변 인물, 특히 친하게 지낸 남성이 살해한 치정살인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 이유인즉 그녀의 아파트가 열려있었긴 했으나 누군가가 억지로 문을 열었다거나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또한 캐롤린의 집 거실 탁자에 커피잔 두잔이 놓여져 있는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외국인을 노린 범죄보다는 면식범에 의한 살인을 의심한 것이다.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은 사람은 다름아닌 캐롤린의 일본인 남자친구인 토모유키였다.
토모유키는 11월경에 한국에 있던 캐롤린에게 찾아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캐롤린은 그자리에서 확답을 주지않고 다음달에 답을 하겠다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고, 토모유키는 다시 다음달인 12월에 들어와서 캐롤린에게 확답을 들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한국경찰은 청혼을 거절당한 토모유키가 범인이 아닐까라고 의심해봤으나 출입국기록의 조회결과 토모유키는 11월 이후 한국에 다시 입국한 사실이 없었고 캐롤린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토모유키를 조사해 그의 알리바이를 확인한 결과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알리바이가 확인되어서 혐의가 풀리게 되었다.
미국인이 살해된 사건이었던지라 서울특별시 경찰국은 결국 주한미군에 공조수사를 의뢰했고 이에 주한 미군은 소속 수사관인 존 보트라이트를 파견해 사건 수사에 참여시키게 된다.
보트라이트 또한 한국 경찰과 마찬가지로 사건의 범인이 캐롤린과 면식이 있는 지인 중에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특히 보트라이트는 캐롤린의 지인들중 캐롤린의 집에 가서 처음으로 시신을 발견했던 캐시 패트릭과 샌드라 에임즈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트라이트가 의심을 시작한 때에는 이미 캐시는 한국을 떠나서 자신이 전에 다니던 워싱턴 주립대학교에 복학한 상태였고 샌드라는 한국에 남아있던 상태라 보트라이트는 샌드라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트라이트가 샌드라에게 "당신이 캐롤린을 죽였습니까?"라고 묻자 샌드라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죽이지 않았다고 답변했고, 보트라이트는 샌드라를 강하게 의심해 그녀에게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도록 했다. 물론 거짓말 탐지기는 증거로 채택할순 없지만 그녀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중요한 정황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샌드라는 거짓말 탐지기 조사 중 캐롤린을 살해한 흉기에 대해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모른다고 했으나 그것은 거짓반응으로 나타났다. 결과를 받아보고 확신이 든 보트라이트는 샌드라에게 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고 거짓말 탐지기의 결과를 들은 샌드라는 결국 사건의 실상을 자백하게 되었다. 샌드라의 자백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샌드라는 캐롤린을 살해한 범인은 다름아닌 그녀의 동료이자 친한 친구 사이였던 캐시 패트릭이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캐시는 레즈비언이었는데 샌드라를 포함한 소수의 동료들은 캐시의 성적 지향을 알고있었지만 그녀를 위해서 모르는척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살해된 캐롤린은 캐시의 성적 지향을 알지 못했다.
캐롤린이 S학원의 강사로 온뒤, 캐시는 캐롤린에게 반해 그녀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캐롤린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려는 결심을 했지만, 그녀의 성적지향을 알고있던 소수의 지인들은 이를 말렸다고 한다. 아무리봐도 캐롤린은 이성애자로 보였던데다가 결혼을 이야기하는 남자친구까지 있었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란 만류를 받았던것. 그러나 결국 캐시는 12월 19일 밤에 캐롤린의 집으로 찾아가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샌드라에 의하면 20일 새벽, 캐시가 자신에게 찾아와 자신이 캐롤린을 죽인것 같다고 털어놓았고 놀란 샌드라는 캐시와 함께 한밤중에 몰래 캐롤린의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샌드라가 가봤을때는 캐롤린의 몸이 아직 따뜻해서 죽지않은걸로 판단해 샌드라 본인이 직접 캐롤린의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에까지 목을 그어 확인 살해를 했다고 시인했다. 샌드라는 이후 둘은 캐롤린의 집을 어지럽혀서 강도가 들어와 살해한것처럼 위장한 뒤에 캐롤린의 집을 빠져나왔다고 진술했다. 샌드라가 거짓말 탐지기에서 흉기에 대해서 거짓 반응을 보였던 것은 사건 현장에 있던 캐롤린을 살해한 흉기를 직접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샌드라는 자신의 진술중 일부를 번복했다. 번복한 진술은 자신이 캐롤린을 확인 살해했다는 것. 샌드라는 전날에는 충격때문에 자신이 확인 살해를 한것처럼 진술했다면서 캐시와 한밤중에 캐롤린의 아파트에 간것은 맞지만 확인 살해는 캐시가 했으며, 자신은 집안을 어지럽히는 것만 도왔다고 진술했다. 결국 보트라이트와 한국 경찰은 다각도로 조사를 한후 샌드라가 캐롤린을 살해할 동기가 전혀 없다는 점을 인정해서 결국 번복된 샌드라의 진술을 바탕으로 그녀를 범인 은닉과 증거 인멸 혐의로 체포후 같은 죄목으로 기소했다. 한국 사법부는 샌드라에 대한 공소를 인정하고 그녀에게 1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는 선고된 형량인 1년도 다 채우지 않고 모범수라는 명목으로 잔여형기를 6개월여를 사면받아 석방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캐롤린의 유족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한국 경찰은 이제 유력한 용의자가 된 캐시에게 한국으로 들어와 조사와 재판을 받을것을 요청했지만 캐시는 한국행을 끝내 거부했다. 그녀가 한국행을 거부할수 있었던 건 당시 한국과 미국사이에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덕을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우방국인 한국은 미국과는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지 않던 상태였다. 필요성이 제기되어 양국 간에 협상이 시작된 건 캐롤린이 살해되기 불과 1년 전인 1987년이었다. 그리고 양 국 사이에 무려 12년동안 협상이 진행된 끝에 1999년에 가서야 타결을 보게 되어 범죄인 인도조약이 양국 국회에서 비준을 받게 되었다. 당연히 한국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인 캐시를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됐다고 쳐도 아서 패터슨처럼 범죄자라는 게 명백하게 증명된 것도 아니고 그냥 용의자 수준인지라 승인됐을 가능성도 낮다,
그나마 그녀를 살인죄로 기소해서 미국에서 재판을 받게 하는것이 유일한 선택지였지만 그마저도 그 당시에는 불가능했다. 미국인이 해외에서 같은 미국인에게 살해되는 일이 생겨도 이를 미국에서 재판할 수가 없는 체제였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해당국가에서 형이 확정되면 확정된 형을 상호협상을 통해 송환하여 미국에서 형을 살게하는 정도였던것. 그야말로 법과 제도의 허점 덕에 캐시는 어떤 기소나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살게 되었다.
캐롤린 가족들은 지속적으로 캐시의 기소와 처벌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해외에서 미국인이 같은 미국인을 살해하는 등의 범죄행위를 미국에서 재판할수 있도록 하는 법률안 입법에 힘써서 결국 클린턴 행정부 때 이 법이 통과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률이 소급적용이 안되는 고로 정작 캐시를 처벌할수는 없었다. 캐시는 워싱턴주 경찰을 통해 한국 경찰에 자신은 캐롤린을 죽이지 않았다는 내용의 진술을 한뒤 그 어떤 수사기관의 조사도 받지 았았다.
2019년 3월 미국 CBS의 48 Hours 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CBS의 추적결과 캐시는 보도 당시 기준으로 워싱턴주에 위치한 웨스턴 워싱턴대학에서 직원으로 18년째 근무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학측은 48 Hours의 보도이후 그녀가 교직원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