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육열이 강화되는 계기는 3가지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공교육 도입, 한국전쟁 후의 혼란한 사회, 박정희 정부 시기의 교육 정책이다.
의무교육 제도는 일제 강점기 시기 다른 근대 문물과 함께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로선 선진적인 문물이었던 공립교육이 일본에 의해 조선에 들어온 것은 맞지만 이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일본은 조선에 공교육 제도를 '들여와 준'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필요해서 들여 왔다는 점이다. 조선에 들어온 공립교육은 그 당시 일본 정부가 일본 국민에게 시키던 교육과 비슷하지만 몇 가지가 빠지거나 바뀌어 있었다. 고급내용은 교육내용에서 빠져 있었고, 당연히 학생의 인권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좀 더 좋은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황국에 대한 충성을 정말 열심히 가르쳤는데, 일본은 조선을 아예 일본에 편입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경성제국대학의 지부가 설립된 것도 그런 이유다. 물론 원래의 일본 출신과 조선인을 동등히 대해줄 셈은 없었고, 일종의 계급 사회를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전쟁은, 모두가 알고있듯이 한국 사회를 초토화시켰다. 모든 것은 불타고 무너졌으며, 행정력을 가진 정부라는 것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막 정부를 수립하던 시절에 미군정은 한국의 교육을 큰 틀에서 유지하되 '교수요목'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교육과정을 작성하여 그것에 맞추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지시한다. 물론 교과서야 미국의 지원하에 새로 찍어내기는 했고 그 덕택에 미국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기는 했지만 교과과정을 하루아침에 다 바꿀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제의 잔재가 꽤 남게 되었다. 이때가 한국 교육의 역사에서 '교수요목기'라고 불리는 시대다. 이때, 국민들은 한번 더 '다 같이 못 사는 시대'를 겪게 된다. 극소수의 잘 사는 사람이 있어봤자 옆집 사람이 못살면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당시 한국인들이 체감하기에 한국은 정말 힘든 시기였고, 너나 할 것 없이 다 가난한 상태였다. 당연히 공부를 하면 공부하는 대로 훌륭해지고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고, 이미 교육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국민들은 아낌없이 교육에 투자하였다.
박정희 시기의 교육정책 당시 중고등학교는 시험을 쳐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시험에 떨어진다면 교육을 제대로 못 받는 등의 문제점이 불거져 불평등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왕이 집권하고 나면 세력을 가진 귀족들을 약화시키듯, 군인이었던 박정희는 학연으로 이어진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또한 초등학교 고학년생들이 중학교 진학을 위해 과도한 혹사에 시달려서 큰 사회적 문제점으로 떠올랐던때였덴데다가 중등교육을 보편화해야될 필요성도 있었기에 강력한 힘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평준화 시켰고, 교육계는 큰 반발 없이 이를 수용했다. 비평준화된 환경에서는 자연스레 학교마다 서열이 생겼고, 높은 서열의 학교는 상대적으로 많은 이득을 봤다. 평준화는 곧 기득권을 내놓으라는 소리니 반발이 생길만도 하지만, 그걸 지시한 사람이 대통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