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2.
1975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UN군 사령부 소속 미 육군 소령 W.D.헨더슨이 북한 측 군인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사건.
북한군이 쓰러진 소령을 구타하는 장면. 벤치의 등받이에 앉아 있는 남성이 문제의 배성동 북한 기자다.
당시 수십명의 대한민국 군인과 UN군들이 겨우겨우 북한군들을 말리는데 수십명의 북한군들이 더 달려오고, 이에 대한민국 측 장병들도 수십명이 몰려와 굉장히 험악한 분위기 속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질 뻔했다고 한다. 참고로 위 사진은 80년대 전두환 정부에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사진과 함께 국민학교 교실마다 붙여놓고 반공 교육에 쓰이기도 했다.
때는 북한의 대남 도발이 끊이지 않았던 4공 시절. 당연히 남북한 최정예 군인들과 미군이 코앞에서 서로 정렬해 있는 판문점의 JSA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그날 JSA에 UN 소속으로 근무하던 헨더슨 소령은 판문점 건물 근방의 한 벤치에 앉아 잡지를 읽으며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이전부터 다른 군 소속 인물들을 상대로 갖은 도발을 감행하던 북한 기자 배성동이 다가와 소령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말을 걸어왔는데 말투가 불순하여 기분이 언짢아진 헨더슨 소령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자 배성동은 의자 위로 올라타 소령을 조롱하고 약을 올리며 그의 머리를 때리는 등 시비를 걸다가 소령에게 침을 뱉었고, 그가 발끈해서 일어서자 그의 얼굴에 펀치를 날렸다. 물론 헨더슨도 배성동에게 카운터와 어퍼컷을 날렸다. 부대 주변을 배회하다 이를 목격한 인민군 몇명이 헨더슨에게 달려들어서 소령을 바닥에 밀쳐 넘어뜨린다. 헨더슨은 그 자리에서 인민군들에게 둘러싸여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근처에 있던 또 다른 인민군들이 이를 보고 개떼같이 몰려와 소령을 구타했다.
인민군과 헌병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장면.
마침 주변에 대한민국 육군 측 인물들도 순찰을 돌고 있었으며, 그들은 소령을 구타하는 인민군 무리를 말리려 카투사 장병과 헌병, 그리고 UN 군 대원들을 합세시켜 몰려와 싸움을 뜯어말리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판문점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헨더슨 소령은 경추 부분에 골절이 일어나고 중태에 빠지는 등, 치명상을 입었으며, 실신한 그를 두고 흥분한 남북 경비병들 사이에 엄청난 난투극이 벌어졌으나 남북 양측 소속의 경비장교들의 개입으로 곧 중단되었다.
국군병원으로 긴급 호송 되고있는 소령.
이후 핸더슨 소령은 보초를 서고 있던 또 다른 UN 소속 미군에게 구조되어 헬기로 병원까지 후송되었으며, 이후 언어구사 능력을 잃는 후유증을 앓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명예 전역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던것이, 당시에는 공동경비구역 JSA 내에서 상호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남한군과 북한군이 대화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북 화해무드가 무르익었을 때는 서로 형 동생하며 통일되면 서로의 집에 놀러가자고 주소를 교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에도 미군 소령이 두들겨 맞을때 남한 병사들이 "형, 왜 이래."라고 하면서 뜯어 말렸다고. 이러한 자유왕래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완전히 구역이 나눠지면서 불가능하게 된다. 이 당시 북한군과 대화한 남한 병사들의 증언이 반공교육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자료에는 휴전선에서 대화한 것과 JSA에서 대화한 내용이 섞여있다.
북한 측은 사후 회의에서도 "핸더슨 놈은 살아서 자기네 소굴을 밟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라고 뻗대며 난동을 부렸고 유엔군 측이 제시한 경비병력의 감축과 비무장, 군사분계선을 따른 분할 요구도 씹어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 그래도 엉망인 북미관계는 더 악화되어, 결국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친다. 양국 군인들끼리 벌어진 구타사건일 뿐이지만 중소 분쟁같은 대형 사건도 비슷한 사건을 통해 일어난 사건인 만큼 역사적으로 꽤나 비중 있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