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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흑역사 '사카린 밀수 사건'

 

1966년 5월 24일,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현 롯데정밀화학. 2015년 인수)이 일본 미쓰이 그룹과 공모하여 사카린 2,259포대(약 55톤)를 건설 자재로 꾸며서 들여와 판매하려고 했다가 들통난 밀수 사건이다. 사카린 이외에도 현금화가 쉬운 일제 냉장고, 밥솥, 양변기 등 말그대로 당대 재벌 삼성그룹이 잡상인마냥 밀수를 자행하다 걸린 황당한 사건.

사실 사건 당시엔 묻혔는데, 몇 개월 후인 9월 15일 경향신문의 폭로로 이 사실이 드러나자 들끓는 민심에 부산 세관은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만 원을 부과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비호하에 정권에 비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은밀한 사업이었다는 설이 있다. 삼성은 밀수한 사카린을 팔아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중에 일부를 밀수를 눈감아준 정권에 상납한다는 시나리오. 실제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씨가 1993년 출판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당시 정권의 묵인하에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의 기사 여파로 국회에서도 뒤집어졌다. 야당 민중당 등은 물론이고 여당인 민주공화당까지 정부의 모르쇠와 삼성 비호에 대해 비판했다. 그렇지만 정부는 삼성 비호에 여념이 없었다. 여야는 계속 한목소리로 관련자 전원 구속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며, 국회는 들끓어오르고 있었다.

1966년 9월 22일, 국회의원 김두한이 이 사건에 관한 대정부 질의 도중 정일권 국무총리 등의 각료를 향해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라는 일갈을 날리며 인분을 뿌린 사건이 발생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고, 김두한 본인도 역시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여론이 몹시 안 좋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김두한에게 화살을 돌려 여론을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대부분의 여론은 "김두한이 깡패는 깡패지만 이번 일만큼은 정말 잘했다!"는 반응이었으므로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여론이 정부에 대해 여전히 분노하고 김두한을 칭찬하는 쪽으로 기울자 신민당은 쾌재를 부르면서 김두한을 옹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김두한을 직접 신민당으로 영입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병철 삼성 회장은 한국비료공업과 대구대학을 정부에 헌납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이때 그룹 승계가 이뤄졌다는 이야기는 사실관계를 모르는 이야기로 이맹희가 자서전에 주장하는 기간에도 이병철은 총수였다. 이맹희가 삼성물산, 중앙일보 등 핵심 계열사 부사장으로 취임하며 계열사를 이끌며 승계를 받았을 뿐이다.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당시 기사들만 검색해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법적으로는 둘째 이창희가 사카린 밀수의 책임을 지고 감옥에 들어가지만 1년 만에 풀려났다. 이병철이 후계자인 장남 이맹희를 살리기 위해서, 둘째 이창희에게 '네가 대신 총대를 메고 감옥에 가라'고 종용했다는 썰도 있다.

이병철 회장의 후계 시나리오에서 이건희는 삼성그룹 내 언론사인 동양방송과 중앙일보를 가지고 독립하기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허나 어쩌다 보니 삼성그룹 총수가 되었다. 이건희의 장인인 홍진기 전 내무부장관이 중앙일보 초대 사장이었고, 이건희도 TBC와 중앙일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맹희는 이후 삼성그룹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별다른 대외 활동 없이 은둔자로 살아야 했다. 이병철 사후 CJ그룹의 유산 상속 과정에서도 이맹희를 건너뛰고 이맹희의 장남인 이재현과 이재현의 외삼촌, 즉 이맹희의 처남인 손경식에게 제일제당(현 CJ)이 할당되었다. 지금도 종종 불거지는 삼성그룹과 CJ그룹의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창희는 새한미디어를 창업해서 경영하다가 1991년 사망하였다. 새한미디어는 새한그룹으로 발전했으나 외환위기 이후 2000년 공중 분해되었다.